최후의 증인이 전하는 안개 너머 세상

 

 

“날씨가 화창할 땐 일본 대마도까지 보이는 날도 있습니다. 탁 트인 바다 풍경이 좋아 1992년에 이곳에 국내 첫 개인 문학관을 지어 이사를 왔어요.”


청사포가 내려다보이는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고개 위엔 작가 김성종(78)이 세운 국내 유일의 추리문학관이 짙은 안개 속에 서 있다. 달맞이고개의 명물로 불리는 안개는 종종 그의 소설에도 등장해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극적 장치로, 사건의 실체를 미궁으로 몰고 가는 배경으로 현실에 실재한다. 작가는 2015년 출간한 한 단편집에서 달맞이고개의 농도 짙은 해무(海霧)에 대해 ‘그렇게 일단 위로 올라온 안개는 점령군처럼 버티고 앉아 도무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갖은 행패를 다 부린다’고 썼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안개 입자처럼 무언가 스멀스멀 몸 안으로 스며드는 건 그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로 유명한 ‘김성종표 추리소설’은 긴장과 불안으로 뜸을 들이다 일순간 아프게 파고들어온다. 기실 눈앞을 가리는 안개를 가장 효과적으로 차용한 건 작가 자신이었다.


“소설 쓸 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내 기질이 그런 모양이지요. 모두가 순수 문학만 높이 평가할 때 추리소설에 빠진 것도 그렇고, 보다 큰 성공을 위해 서울로 올라갈 때 도리어 부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것만 해도 그래요. 나 혼자 안개 속에서 한평생 외롭게 추리소설에 매달려 왔지만 한 번도 위축되거나 후회한 적은 없어요. 다시 태어나도 추리소설을 택할 겁니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가 지금껏 써온 작품은 종수로 50여 편, 권수로는 모두 100여 권에 이른다. 국내 최초의 추리작가로 평가받는 김내성에 이어 50년 넘게 혈혈단신 한국 추리문학을 지켜온 이 단구의 노신사는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글 쓰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었다. “문학관 4층에 집필실이 있긴 하지만 평소에도 1층 북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며 글 쓰는 걸 제일 좋아해요. 컴퓨터나 타자기도 써봤지만 수첩에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게 가장 편안해 어디서든 원고를 쓸 수 있으니 참 다행이지요.


한평생 추리와 하드보일드에 천착해온 김성종표 추리소설은 명실공히 신문 연재소설의 전성기인 칠팔십년대를 뜨겁게 달군 베스트셀러였다. 국제적 스파이 마타하리의 암호명에서 제목을 따온《여명의 눈동자》나 영화로도 제작된《제5열과《최후의 증인》, 그리고 한국 추리문학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되는《어느 창녀의 죽음《국제열차 살인사건》등은 추리 기법을 통해 대중의 지적 호기심과 감성을 사로잡았다. 매순간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던 각박한 현실이 추리 거장의 오늘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연재를 하는 30년 동안 하루도 쉬어본 날이 없어요. 일 년마다 꼬박꼬박 책 2권씩을 썼으니까요. 글 쓰는 일을 지겹게 생각했다면 못했을 겁니다. 원고를 안 쓰고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요. 중요한 걸 빠트린 것 같아 수첩을 꺼내 놓고 글을 쓰든지, 책이라도 읽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 전에 그는 글 쓰는 일로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데뷔 이후 50여 년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글쟁이였다. 많은 때는 8개의 지면에 소설을 동시 연재한 적도 있었다. 신문 연재소설의 한 회 분량이 대략 200자 원 고지 7매 정도. 그만한 양의 원고를 동시에 8곳의 지면에 연재한다는 건 웬만해선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김내성 작가가 경향신문에 《신락원의 별》이란 소설을 연재하다 돌아가셨어요. 어느 날 나도 ‘정말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펑크 낼 각오를 하고 지리산으로 훌쩍 떠난 일이 있어요. 그런데 밤이 되자 원고가 걱정돼 산장 구석에서 수첩에 글을 써서는 새벽에 서울에 있는 여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원고를 불러준 적도 있습니다. 결국 30년 동안 펑크 한 번 못 내본 셈이네요.


그의 작품은 중국에 10여 편, 일본에도 2편의 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다. 출세작인《최후의 증인》은 프랑스어로 출간돼 추리문학의 본고장에도 소개되었다. 이렇듯 작가로서 널리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을 그는 직업에 대한 열정과 신념에서 찾는다. 힘들더라도 지치지 않고 계속 쓰는 것, 작가라면 마땅히 글 쓰는 일에 미쳐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역시 박봉의 잡지사 기자로 일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젊은 시절, 이를 악물고 글쓰기에 매진한 끝에 삶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다.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최후의 증인》은 그 무렵 매일 다방에 앉아 쓴 원고였어요. 마감일을 앞두고 취재 핑계로 사무실을 나와서는 하루 종일 다방에서 수첩에 응모 원고를 썼지요. 200자 원고지에 옮겨 적을 시간이 부족해 마감 전날 밤 우리 부부와 지인까지 셋이서 각자 원고를 나눠 간신히 시간 안에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어느 자전 에세이에서 ‘이날 입때껏 따뜻한 밥 한 끼 먹어보지 못한 나에게는 200만 원의 장편소설 현상금이 군침을 돌게도 했다.(중략) 그것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만약 이것이 실패했다면 죽음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당선된 것이다’라고 절박했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간절히 매달렸던 소설 한 편이 작가생활에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대중소설을 한 수 아래로 깔보던 분위기 속에서도 심사위원을 맡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추리적 기법으로 그려낸 한국전쟁의 비애’라고 극찬한 심사평이 자신감을 북돋아줬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부터 일간스포츠에 연재를 시작한 대표작 《여명의 눈동자》는 작가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국내에선 거의 유일하게 추리기법을 접목한 그의 소설은 무려 6년 동안 낙양의 지가를 높이며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다. 연재소설 덕분에 신문판매가 급증하자 사주 장기영 사장의 집요한 부탁으로 동일 지면에 ‘추정’이란 가명으로 《제5열》을 동시 연재한 일도 웃지 못 할 문단의 전설로 남아 있다. “돌아보면 참 열심히 써오긴 했어요. 오십 년 넘게 써온 글이 원고지로 따지면 10만 장이 넘습니다. 서른다섯 살 때 일제강점기부터 8.15 독립,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대하소설《여명의 눈동자》의 연재를 시작하기 전까진 소설로 밥 먹고 살 수 있으리란 건 기대도 못했는데 추리소설 작가가 나뿐이라 연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고요. 돌이켜 보면 남들은 다 외면하는 추리소설을 고집했던 게 참 다행이었다 싶어요.


한평생 지칠 줄 모르는 김성종의 필력은 글 쓰는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마음에서 나온다. 노년으로 접어든 지금도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상의 작동원리에 관심이 많다. 사건 사고, 평범한 일상에서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이면에 감춰져 있는 인과관계를 추론하며 작가적 상상력을 더하는 게 생활화돼 있다. 2014년부터 3년간 부산일보에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원고지 50매 분량의 단편소설을 연재했을 만큼 작가로서의 욕심과 창작욕도 마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자신을 능가할 만한 젊은 추리작가들이 나타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젊은 작가들에게 인생의 전부를 걸고 승부해 보겠다는 신념을 가지길 당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가 있다면 의심하지 말고 인생을 건 승부를 걸어야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신념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에서 나옵니다. 주춤거리거나 회의가 느껴진다고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그 다음 일엔 더 자신감이 없어지죠. 인생에는 신념으로 버텨야 하는 일들이 있어요. 작가로 성공하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틈 날 때마다 써야 합니다. 삶이 또한 그런 겁니다. 지금은 외롭고 힘들겠지만 꿋꿋이 버티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 눈앞의 안개가 걷히는 날이 옵니다.”


올해로 데뷔 51년째를 맞은 작가는 여전히 글 쓰는 일로부터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다. 요즘도 그는 여하간 편히 쉬기를 원치 않는 현역 작가로 활동 중이다. 출간 계약을 마친 청소년소설《늑대소설 다루》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오사카 살인사건》의 집필,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한국전쟁 배경의 대하소설을 구상하는 것만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작가 김성종에겐 오직 쓰는 일이 삶의 전부다. 덕분에 우리는 내년에도 근처의 어느 카페에서 집필에 몰두해 있는 노작가의 행복한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종원 편집장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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