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 사람] 눈치 없는 남자 / 이인권, SBS 아나운서

요즘 사춘기가 빨라졌다고 들었다. 나의 사춘기는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찾아왔다. 그 사춘기를 찾아옴과 동시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고, 사춘기보다 눈치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사춘기의 특징 중 하나는 또래와의 감정싸움이다. 하지만 나는 다툴 수가 없었다. 체격 차이가 너무 컸고,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말랐고 영어도 잘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교환학생은 미국의 일반 가정집에서 생활해야 했기에 그들과 다툼이 생기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타지에서 일 년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아니 생존하기 위해서는 피 끓는 사춘기의 감정보다는 눈치가 더 필요했다.

내가 살았던 가정집은 심지어 아기가 있는 신혼집이었다. 이 집에 오기까지 사건이 있었지만,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겠다. 오붓한 신혼을 빼앗긴 호스트 엄마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나를 데려온 호스트 아빠는 눈치를 봤다. 이때 알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안의 권력은 여성이 가진다는 사실을. 이때부터 호스트 엄마의 마음을 얻기 위한 나의 생존 즉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살아남았고 행복한 미국 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2가지의 사건이 컸다.

하나는 브라질에서 온 또 다른 교환학생의 등장이었다.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호스트 가족과 같이 생활을 해서 숙식이 제공된다. 초콜릿이 너무 좋았던 그 친구는 거실의 초콜릿을 다 먹고 자신의 초콜릿은 따로 방에 숨겨두었는데 이게 걸렸다. 호스트 엄마는 이를 보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이를 본 나는 정반대로 초콜릿을 사서 거실에 채워두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닌 거 같다). 하지만 나를 향한 호스트 엄마의 눈빛이 조금은 따뜻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필요한 것은 큰돈이 아닌 작은 관심과 눈치라는 것을 배웠다.

두 번째 사건이 사실상 내 미국 생활을 결정지었다. 호스트 아빠는 목장 주인이었고, 호스트 엄마는 치과에서 근무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아기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호스트 아빠가 가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 내가 아이를 봤다. 그날도 아기를 보면서 집에 있었다. 흔들의자에서 아기를 안고 TV를 보고 있었는데 아기는 잠이 들었다. 그 사이 호스트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도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기를 품에 안고 자는 척을 했다. 호스트 엄마는 흔들의자에서 잠든 아기와 잠든 척하는 나를 우두커니 보더니 카메라를 꺼내서 우리를 찍었다. ‘찰칵찰칵호스트 엄마의 마음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날 이후로 호스트 엄마는 나를 친아들처럼 대했고, 나는 권력자의 마음을 얻었다. ‘순간의 판단이 인생을 바꾼다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나는 많이 바뀌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나의 변화에 부모님이 조금은 속상해하셨다는 것을 이후에 알았다. 특히 남과 식사 속도를 맞추려고 남의 밥그릇을 보는 행동에 고생 많이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이 경험이 없었다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매력을 발산하기보다는 면접관들의 표정을 보고 면접장의 분위기를 읽었다. 그리고 2016, 내가 그토록 바라던 SBS 아나운서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아직은 모르지만 말이다.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동기 PD들에게 물어봐도 눈치 없는 출연자가 제일 싫다고 했다. 촬영 중에 이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분위기도 어수선해지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맞는 말 같다. 만드는 사람이 불편한데 이를 보는 사람은 오죽할까. 아나운서가 된 지 고작 4년째이지만, 남들에게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쟤는 봐도 불편하지는 않아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진심이다. 동기 PD들이 이 글을 봤으면 좋겠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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