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첫 만남의 기억으로 / 김문정, 음악감독

원고 청탁을 받고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그중 몇 명은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순간 마법같이 그 시절로 돌아가 기분 좋은 시간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한 편의 공연을 올리기 위해 상대해야 하는 배우, 스텝, 연주자들은 적게는 수십, 많게는 백 명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공연 준비 기간부터 종료까지거의 매일 마주하며 가족보다 가깝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공연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각기 다른 일상(공연)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가끔은 허탈과 공허감을 주기도 한다.

이는 그 수많은 만남 중 특별한 인연을 추려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배움, 안타까움, 자랑스러움, 때로는 분노와 원망도 있었겠지만 모두 감사함으로만 채워지는 인연들임에는 분명하다. 다시 작업에서 만나면 기억의 회로를 돌려보는데, 한번 경험치가 생겨 서로의 성향을 이해하고 조금 더 깊이 있는 인연이 되기도 하면서 작업성과도 올릴 수 있게 된다. 코로나19로 공연이 중단된 최근 서너 달, 활기 가득했던 그런 가족들과 같은 만남을 가질 수 없던 나의 일상은 참으로 무료했다. 거의 20년을 일 중독이라는 별명을 듣고 살아서 고요한 일상이 그리웠지만, 세상의 정적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가자! 걸어보자!’ 사실 그동안 집은 숙소에 불과했으니 주변에 관심을 둘 여유는 없었다. 맨 처음 나를 반긴 건 아파트 단지 내 흐드러지게 열린 벚꽃. ‘작년 이맘때에도 활짝 하늘을 하얗게 가리고 있었을 텐데 미처 못 알아봤네. , 미안.’ 운 좋게 걸을만한 거리에 한강시민공원이 있다. 평소 운동과는 거리가 먼 내게는 다소 과감한 선택이었지만 언제 또 걸어보나 싶었다. ‘한강, 어쩔 땐 하루 두세 번씩 차로 건너다니기도 하지, 잘 알아.’ 너무 당연히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저 위풍당당함. 우리 민족의 역사를 오롯이 감싸 안는 단아함과 우아함. 내가 한강을 이렇게 여유 있게 걷는 일이 언제 있었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이기 시작한다. 시민 공원은 적어도 세 개 이상의 길로 된 듯하다. 보행 도로, 자전거 도로, 강과 가깝게 걸을 수 있는 비포장도로. 때에 따라 자동차 도로. 집 앞 공원은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제법 넓은 잔디 광장(?)도 있었다. 유럽 어디의 푸름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플라타너스 거리도 있었고,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도 군데군데 설치되었음은 물론 아이들을 위한 자연학습장과 생태계 공원도 아기자기했다. 좀 더 걸으니 다리 하나가 나오자 내친김에 강을 가로질러 가보기로 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걷는 기분은 자동차 매연도 잊을 만큼 상쾌했다. 다리 끝에는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도서관과 예쁜 카페가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강 건너 시민 공원에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없는 게 없다. 허용된 낚시 구간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예쁜 산책로, 분수대, 웨딩사진을 찍어도 손색없을 독특하고 멋진 벤치들.

그 후 내 일상은 바뀌었다. 매일 두어 시간씩 또 다른 산책로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생겼다. 다른 공원을 찾아냈고, 이제는 주변 상가들의 위치도 어느 정도 파악된다. 한번은 늦은 밤 한강 주변 인적 드문 산책길에 나섰다가 인기척에 놀라 냅다 달린 일이 있다.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가로등 하나 없는 그 길이 무서워 저 멀리 불빛만 보고 뛰었는데, 날이 밝을 때 가보니 갈대 무성한 예쁜 장소라서 피식 웃은 기억도 난다. 이렇게 나는 한강을 만났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 이전의 조상들과 함께했을 한강을 거의 반백 살이 된 지금, 가깝게 만난 것이다. 뮤지컬 <BABY> ‘Story goes on’이라는 넘버가 있다. 원치 않는 아이를 갖게 된 20대 여성이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생명의 잉태함에 소중함을 깨달으며 부르는 곡이다. 할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었던 이야기를 이제 나와 내 아이가 이어 나간다며, 그렇게 우리들 세상의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내용이다.

당연했던 모든 일상이 감사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나도 때론 버거웠던 공연 가족들과 같은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느끼지만, 한편 그동안 나의 관심(?)을 못 받고 말없이 내 곁에 있던 것들과의 만남 가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반짝이고 있었을 아름다운 한강. 미처 못 알아봤던 푸름과 알록달록한 꽃들. 앞으로의 만남에도 다른 의미가 생겼다. 주변을 좀 더 돌아보고 세심히 살펴야 함을 깨닫는다. 곁을 주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을 뿐, 얼마나 반짝이는 보석을 품고 있을 빛나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시 바빠진 일상에 여유롭게 한강을 걷진 못하지만, 그간의 작업을 통해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한 그 어떤 것들처럼 한강도 가끔 좋은 기억을 내게 선물한다. 기분 좋은 추억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다림, 그리움만으로도 힘든 하루를 이겨낼 수 있듯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봄에 나를 만나준 한강에게 고맙다. ‘이젠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 널 다시 만나도 아름다운 첫 만남의 기억으로 더욱 이해하고 성숙한 만남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아.’

*1971년 출생. 서울예술대학 작곡 졸업, 단국대 공연예술학 석사. <레미제라블><맘마미아><영웅><모차르트><서편제><미스사이공> 외 다수의 작품에 참여. Jtbc 팬텀싱어 시즌 1~3 심사위원. 한세대 공연예술학과 교수, The M.C 오케스트라 지휘자.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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