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다] 누구를 위한 아저씨의 서사인가 / 허남웅, 영화평론가

한국영화계에 멋진(?) 아저씨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황정민과 이정재가 <신세계>(2012) 이후 다시 호흡을 맞춘다고 해서 화제를 모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얘기다. 이번에는 브라더가 아니라 철천지원수. 인남(황정민)은 암살자다. 이번 건만 딱 끝내고 은퇴할 작정이었다. 일이 틀어졌다. 인남 손에 죽은 이의 동생이 지옥에라도 따라가 복수하겠다고 인남을 찾아 나선다. 그의 이름은 레이(이정재).

레이는 악명 높은 킬러다. 손에 넣은 타깃을 거꾸로 매달아 칼로 배를 갈라 죽이는 게 특기다. 사람이 아니다. 절대 악()이다. 인남도 그 사실을 알고 경계하지만, 뜻밖의 일이 생긴다. 예전에 헤어졌던 여인이 태국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에게는 딸아이가 있는데 바로 인남의 핏줄이다. 지금 행방불명이다. 옛 여인의 사망이 이와 관련 있다. 인남은 딸의 행방을 추적하고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인남에게 딸은 자신의 죄를 사할 회개의 기회다.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못 할 짓을 했고, 그건 옛 여인과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인남 그 자신이 어떻게 되든 딸만큼은 꼭 찾아내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조처를 할 생각이다. 레이는 인남이 그러거나 말거나 형의 복수가 전부다. 인남의 처리 외에는 눈에 뵈는 게 없다. 이러다 인남은 물론 딸도 죽게 생겼다. 인남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심정으로 레이에 맞선다.

소녀를 구해 그 결과로 구원받는 남자의 서사는 <아저씨>(2010)가 먼저다. 인간병기의 과거를 숨기고 살던 아저씨가 마약밀매조직에 납치된 이웃 소녀를 구해 세상에 나와 용서를 구하는 이야기는 원빈이라는 피사체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큰 인기를 얻었다. 나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관해 <씨네21>20자평에 태국으로 배경을 옮긴 아저씨 , 아저씨 라고 다소간의 비하 의미를 담아 적어 보냈다.

두 영화는 폭력에 연루된 아저씨가 면죄부로써 소녀를 구하는 이야기의 콘셉트를 공유한다. 나는 <아저씨>는 즐긴 편이지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그렇지 못했다. 결과로서 이 영화들이 각각의 아저씨에게 내리는 처벌 방식이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다. 영화에서 폭력 묘사는 볼거리의 측면에서 어쩔 수 없이 멋있고, 아름다운 쪽으로 꾸밀 수밖에 없다.

미화의 혐의를 피할 수 없는 영화들은 그래서 창작자가 주인공의 최후를 두고 폭력을 행사한 원죄에 대한 대가를 관객에게 물을 수 있게끔 작품 내적인 알리바이를 마련하고는 한다. <아저씨>의 아저씨는 소녀를 구한 후 죽음으로써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과를 스스로 받으려 했다. 영화는 이를 멈추고 법에 인계하여 정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끔 결말을 이끌었다.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영화가 갖는 최소한의 윤리다. 특히 폭력의 결과로서 최종 형태인 죽음을 다룰 때는 더욱 창작자의 윤리가 중요하다.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둘러싼 맥락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멋있는 죽음은 폭력을 미화하는 가장 잘못된 형태다. <아저씨>와 다르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인남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레이에게서 딸을 구하기 위해 결국 자폭하는 방식으로 이 모든 혼돈의 상태를 정리한다.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된 결말로 인남에게 주어지는 건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라는 신화 같은 서사다. 죽음을 경유한 아저씨에서 아버지로의 복권은 인남이 암살자로 벌인 폭력을 오히려 피치 못할 사연으로 구축한다. 내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즐길 수 없고, 무엇보다 결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런 종류의 아저씨 신화를 필요로 하는 건 관객인가? 남자 배우들이 여전히 흥행의 보증수표라 믿는 창작의 주체인가?

인지도 높은 중년의 남자 배우를 캐스팅하여 폭력으로 남성성을 과시하는 영화는 <악질경찰>(2018) <브이아이피>(2017) <우는 남자>(2014) 등 시효가 거의 만료됐다. 흥행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니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같은 작품은 안일하고 게으른 기획에 가깝다. 다만 이 영화가 구해야 했던 건 한국영화계에 유령으로 떠도는 아저씨 신화를 놓지 못하는 창작자가 됐어야 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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